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데즈먼드 투투 (문단 편집) === 충돌 === [[1983년]] 보타 대통령은 1948년 [[국민당(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 국민당]]이 집권한 이래로 처음으로 국회의원 선거에 한해 투표권을 [[케이프 컬러드|컬러드]](혼혈인)와 [[인도계 남아프리카 공화국인]]에게까지 확대하겠다는 방침을 발표했다. 이는 획기적인 발표였으나, 여전히 인구의 80%에 달하는 흑인들은 배제했다. 이는 흑인들을 남아공 시민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기존의 방침을 고수한다는 선언이나 다름없었고 당연하게도 흑인들은 크게 분노했다. 전국 각지에서 시위와 집회가 잇달았고 기세는 몇개월이 지나도 사그라들지 않았으며 오히려 [[1985년]] 3월 샤프빌 학살 25주년 집회에서 폭발했다. 남아공의 최남단 우이텐 하지에서 경찰이 또다시 비무장 시위대에 발포, 스무 명이 숨지고 그 이상이 부상당한 것이다. 남아공은 그야말로 뒤집혔다. 전국에서 폭동이 일어났으며 흑인들은 일손을 놓고 [[파업]]에 들어갔다. 이에 맞서 정부도 경찰과 군대를 투입해 잔혹하게 진압함에 따라 남아공 전체가 [[최루가스]]와 총성에 뒤덮혔다. 유혈사태는 날이 갈수록 악회되어 무장 경찰들이 차량을 타고 돌아다니며 의심가는 사람들을 닥치는대로 체포했는데 그중에는 11살짜리 아이들도 있었고 그 수가 3만 명을 넘었다. 거기에 흑인들끼리의 유혈사태도 속출했다. "동지들"이라 불리는 과격 흑인 청년 단체가 결성되어 백인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흑인들을 체포하여 목걸이형(necklacing)을 선고하는 일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고, 이렇게 사망한 사람이 수십 명을 넘었다.[* 목걸이형은 기름을 채운 [[타이어]]를 목에 걸고 불을 붙여 죽이는 잔인한 사형 방법이다. 사형(death penalty)도 되고 사형(lynch)도 된다. 아이러니한 건, 원래 목걸이형은 과거 반항적인 흑인이나 흑인에게 동정적인 백인을 살해할 때 사용하기 위하여 남아공의 백인들이 고안했던 형벌이란 것이다.] 투투는 흑인들에게 평화를 촉구하며 유혈사태를 중지할 것을 요구했지만 그의 말을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1985년 7월 투투는 두두자라는 마을을 찾아 경찰에 살해된 4명의 흑인들의 장례식을 주관했다. 두두자는 최악의 국면에 치닫는 곳이었는데 경찰들이 열명의 흑인들을 살해하고 흑인 지도자들을 체포하자 분노한 흑인들이 경찰과 백인 지도자들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워버리는 등 보복이 맞물리고 있었다. 투투는 그곳에서 폭력행위를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연설을 했으나 흥분한 군중들에게 그는 실망을 줄 뿐이었다. 흑인들은 백인들을 몰아낼 강력하고도 전투적인 지도자를 원했고 투투는 백인들에게 굴복하는 비겁한 작자로 매도되었다. 그의 인기는 날이 갈수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투투가 두두자를 떠난지 며칠만에 어느 여자가 경찰의 끄나풀로 몰려 드잡이를 당했고 텔레비전을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는 가운데 처참하게 맞아죽었다. 같은 시각 콰테마 스타디움에서 또다른 14명의 희생자들의 장례식을 주관하던 투투는 그 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으며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 '''"만약 또다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나로서는 백인에게서 자유를 찾아야 하는 명목을 찾기 어려울 것입니다. 만약 폭력이 계속된다면 나는 나의 가족들을 데리고 보따리를 꾸려서 내가 그렇게도 사랑하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이 자유를 찾겠다는 동기는 지극히 정당하고도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승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자유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의 적들이 악용할 수도 있는 그런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안됩니다."''' 흑인들은 "누가 탄압을 하고 있는데!"라면서 격렬하게 반발했고 투투가 보타 대통령과 회동하자 그를 배신자라고 부르면서 등을 돌렸다. 그런데...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